문화/관광

시흥동 역사문화길

[2코스]시흥동 역사문화길

맑은 공기와 함께 골목길의 정취에 취해 걷고 싶을 때,
그리고 그 걸음만큼 역사를 알아가고 싶을 때. 이 때를 모두 충족시키는 <시흥동 역사문화길>을 소개한다.

1시간 가량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시흥동의 구석구석을 걷는 이 코스는 시작 전 핸드폰 지도 어플을 설치하기를
추천한다. 헛걸음을 방지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마치 보물지도를 따라 모험을 떠나는 기분마저 들게 해준다.
자, 지도 어플을 설치했다면 이제 역사의 보물들을 찾아 떠나보자.
이 여정은 ‘시흥5동 836-33번지’ <은행나무오거리 시흥행궁터> 에서 시작된다.
은행나무오거리 나무 사진
1.
은행나무오거리
시흥행궁터

(행궁 :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

조선시대 정조는 효자로 유명하였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묻힌 무덤이 풍수지리상으로
좋지 않음을 깨달은 정조는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는 수원부
화산으로 묘를 옮기고 이를 ‘현륭원顯隆園’ 이라 명하였다.
그 때 정조가 한양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길에 하룻밤 머물기 위해
세운 별궁이 ‘시흥행궁’ 이다.

은행나무오거리 나무 사진
은행나무오거리 나무 사진

행궁의 모습을 현재는 볼 수 없지만 800년 이상된 은행나무 세그루가 그 터를 지키며 묵묵히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이 가늠 할 수 없는 800
년이라는 세월을 깊게 삼키고 있는 은행나무 앞에 서서 정조가 이 곳에 머물며 아버지를 그리웠을 마음을 생각해본다.

은행나무의 기운을 받아 다음 목적지 ‘시흥4동 169-53번지’ <단군전 터> 로 발걸음을 이동해보자.

2.
단군전 터
대한제국기에 궁중 요리를 전문으로 한 최초의 조선
요릿집 ‘명월관’ 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그 식당의 주인 ‘안순환’ 이 일제치하였던 1930년
민족정신과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사비를 털어 세운
곳이 ‘단군전’ 이다.
‘단군전' 에서는 단군의 그림을 모시고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지만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 1936년 땅에 묻혀
폐쇄되고 만다. 6.25전쟁 후 지역주민들은 이 ‘단군전’ 을
복구하기위해 노력하였으나 1981년 토지소유권에 휘말린
‘단군전’ 은 결국 허물리게 되었고 현재는 연립주택에
붙어있는 표식으로나마 그 터를 확인 할 수 있다.

동네의 언덕을 따라 올라가 만난 건물 기둥에 작게 붙어있는 표식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지긴하나, 일제에게 몸은 빼앗겼어도 영혼만큼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던 우리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며 묵념해본다.

이 곳에서 ‘시흥동 807-14호’ 를 입력하고 300보 정도 걸으면 동도슈퍼 건너편에 위치한 <강희맹 살던 곳> 에 도착한다.

3. 강희맹 살던 곳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학자 ‘서거정’ 과 함께 쌍벽을
이룬 조선 전기의 문장가 ‘강희맹’ 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중국의 명문장가 사마천, 한유, 유종원, 구양수에 비유될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고 정치가로서도 노련하였다.

강희맹 살던 곳 안내문 사진
강희맹 살던 곳 비석 사진

국가와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공신’에 3차례나
책봉되었고 왕의 총애와 신임속에 여러 관직을 거쳐 종1품인
‘좌천성’에도 올랐던 인물이다.
또한 강희맹은 농서 ‘금양잡록’ 을 저술하였는데 이 농서는
조선초기 경기도 일대의 농업환경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이 곳에서 가까운 곳에 서울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역>이 있다.

4.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역

이 곳에는 조선 개국공신인 순흥안씨 안경공과 아들, 손자에 이르는 3대의 묘가 안치되어있다.
원래 이 묘역 자리는 태조 이성계가 묻힐 곳이였으나 안경공이 먼저 눈을 감으며 이 곳에 묻혔다고하니
이 묘역의 풍수지리가 얼마나 좋은지 가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묘역의 기운과 풍경이 깊고도 단단한
느낌을 준다. 또한 이 묘역의 묘와 석물들의 보존상태가 좋아 조선 전기 분묘 형식과 묘제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여기까지 걸어와 고개를 돌려보면 호암산이 보이는데 이 호암산 역시 조선 개국에 큰 역할을 한 역사가 있으니 시흥동이 역사적으로 꽤
중요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든다.묘역에서 ‘시흥동230-40’ 을 검색하고 2,000보 정도 걸어가면 <3층석탑 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

5.
3층석탑 향나무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향나무가 우리를 반긴다.

500년 이상 된 이 향나무는 은행나무오거리 행궁터의
은행나무들처럼 묵묵히 그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 향나무는 일년에 한 번씩 동네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평온과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낼만큼 중요한 마을의 수호수였으며
현재는 시보호수로 지정되어있다.

3층석탑 사진
향나무 사진

이 향나무 그늘 아래에 아담하고 잔잔한 3층석탑이 하나 있는데, 이 탑에 관해
자세한 역사는 없으나 500년 이상된 탑으로 추정되며 구전에 의하면 자식이
없는 아낙네가 이 탑에 정성 들여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향나무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범일운수종점 정거장’ 을 향해 300보 정도
걸어 내려가면 버스종점 건너편에 이 코스의 종착지인 <시흥향교 터> 가 있다.

6. 시흥향교 터

모두 알다시피 ‘향교’ 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당시 시흥을 비롯하여 과천, 안양, 의왕지역의 유생들이
모두 이 시흥향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재밌는건 이
향교가 근처 관악산에 있는 ‘연주암’ 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유림들의 행패가 심하던 시기에 스님들이 이 앞을
지나며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1944년 일제가 시흥향교를 과천향교에 통합시키며
지금은 그 흔적을 볼 수는 없지만 언젠가 이 곳에 울려
퍼졌을 유생들의 글 소리를 잠시 떠올려본다.

시흥향교터 안내문 사진
지도를 따라 시흥동 구석구석에 숨겨진
보물들을 찾아 걷고 이 길의 끝에서면 문득 우리
선조들의 역사에 감사함이 느껴진다.
조선을 개국하기 위해, 선왕을 기리기 위해,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해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살아가던
선조들의 역사. 그 역사가 있었기에 그 흔적 따라 걷는 오늘의
우리가 있다.

이 걸음만큼 우리의 역사에 더 가까워지기를,
그리고 선조들이 꿈꾸던 이 땅의 미래에 더 가까워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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