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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의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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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금천구 지도 이미지 입니다.

서울 서남권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금천구는 예로부터 경기지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지금의 금천구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다스렸다고 하나 정확한 고증자료가 없고, 4세기말부터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어 잉벌노현(仍伐奴縣)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잉벌노란 ‘뻗어나가는 땅’ 또는 ‘넓은 들’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 명칭은 이후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경덕왕 16년(757년)에 곡양현(穀壤縣)으로 개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태조23년(940년)에 금주(衿州)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이때부터 옷깃 금(衿)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줄곧 금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13년(1413년)에 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되었다.

금천현이란 이름은 이후 정조 19년(1795년) 시흥현(始興縣)으로 변경될 때까지 380여년간 불리워 졌다.

조선시대의 금천현 관할구역은 동쪽으로는 과천현(果川縣), 서쪽으로는 부평부(富平府), 남쪽으로는 안산군(安山郡), 북쪽으로는 노들나루(露梁津)까지 미치는 매우 광활한 지역이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조선후기 금천현은 가호수가 1,873호에 인구는 7,763명이고 행정구역은 6개면 39개 동리였다

조선 정조 19년(1795년)에 시흥현(始興縣)으로 다시 명칭이 바뀌었고 다시 1895년에 시흥군(始興郡)으로 승격되었는데 관할구역은 지금의 금천구와 영등포구, 동작구, 관악구, 구로구 및 안양시와 광명시의 일부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며 군청은 지금의 시흥5동 지역에 있었다.

1910년에 이르러서는 군청사가 영등포구 문래동으로 옮겨졌고 1936년에는 영등포지역이 경성부 관할로 편입된 이후 1945년까지 군청사는 그대로 영등포에 있다가 1945년 미군점령에 의해 영등포구가 신설된 이후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의 확장으로 시흥, 독산, 가리봉지역이 영등포구에 편입되었다. 이후 시흥, 독산동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행정동이 몇 개로 나뉘어 졌고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한 지역발전계획이 수립되면서 1980년 구로구가 신설되었으며 금천지역은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94년 12월 22일 ‘서울특별시금천구등9개자치구설치및특별시 · 광역시 · 도간관할구역변경등에관한법률’이 제정되고 이어 1995년 3월 1일 독산동 및 시흥동지역 전역과 가리봉동 일부 지역이 가산동으로 명칭을 변경, 금천구로 새로이 출범하게 되었다.

자료담당부서 문화체육과 박점덕 전화번호 02-2627-1451
최종수정일 : 201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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